이선교사 이야기

어느 자비량 선교사의 외롭고 힘든 회복선교 길!

이해왕 선교사 2004. 7. 10. 07:11
LONG

박목사님이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고생을 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 흰빛 영상이 마구 일그러지어, 마치 위에서 누가 사람을 잡아끌어 올리는 듯한 형상이었으며, 오히려 성경 문구를 봉독하거나 인용하는 말을 할 때는 그냥 잔잔한 형상이 되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어찌 몸이 후들후들 떨렸는지 몰랐다. 여니 때와 같이 가게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사업장으로 바로 가려고 차를 탔으나 도저히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박목사님은 초청 설교자이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주머니와 지갑을 뒤져서 몸에 지니고 있던 돈을 동전만 제외하고는 모두 봉투에 넣어서, 친교장으로 가서 송광률 담임목사님에게 예배시간에 체험했던 일을 말하고 박목사님에게 전해 달라고 봉투를 내밀었다. 

 

나중에 성령체험 기록들을 살펴보니, 성경을 다 읽은 것이 6월 말이었고 성서통신과정을 97년 7월 18부터 공부를 하였으니, 성경을 다 읽을 무렵에 흰빛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런지 19일 후에 곧바로 성서통신과정 공부를 시작하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알 수 있었다. 


5. 회복 선교센터 설립에 얽힌 사연 (1999년 9월 30일) 


그간 여러 회복모임 참석경험과 도박 상담자 교육을 통해서, 가정에 중독 도박자가 있게 되면 가족전체가 고통을 당하게 되어서, 회복은 가족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99년 6월 13일부터 자비로 신문과 방송에 “중독도박은 치료받지 않으면 병만 더 깊어진다”는 홍보를 시작했고,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문제도박교실”을 무료로 실시했다. 당시 150 여건의 상담전화와 60 여분이 가족교실에 직접 참여하였었다. 


가족교실을 하면서부터 2 가지로 고민이 더 생겨났다. 하나는 대부분 가족교실 참여자들이 가족만 이런 교육을 받으면 무얼 하느냐며, 이구동성으로 도박자들을 회복으로 안내할 방법을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들을 하였다.  


다른 하나는 단도박 모양 도박회복모임을 실시하려고 하자, 주위 친구분들이 극구 만류하며, 정부에나 제도적으로 확실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는 중독자 사역을 하다가는 어떤 큰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니 중단하거나 제대로 절차를 밟고나서 하라는 충고가 있었다. 


♡ 새벽녘의 기이한 꿈 (1998년 10월 24일) 


꿈에서 마치 영화에서 본 듯한 모세나 예수님 같으신 모양을 하신 분을 만났는데, 나는 너의 의붓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분이 인도하는 곳에 가보니 이미 10 여명의 다른 의붓자식들도 있었다. 새 아버지라는 분은 한국의 서해안 바닷가 같은 곳에 앞뒤로 사무실 같은 방들이 나란히 있고 가운데는 통로가 있는 시멘블록 단층집을 짓고 있었고, 건물이 다 완공되자, 하루는 의붓자식들을 다 데리고 나가서 각자에게 방 1 나씩을 나누어 주셨다. 


나는 맨 뒤편의 마지막 방을 배정해 주셔서,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네가 알아서 쓰고 싶은 데로 쓰라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당시는 뜻도 모르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었다.  


99년 5월 10일에는 정은옥 집사님이 진행하는 미주복음방송 간증프로에 초청을 받아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증거 하기도 했다. 


♡ 도박 상담자 교육 참여 (1998년 11월)  


좀더 도박회복에 대해서 알고 싶어져서, 1998년 11월부터는 캘리포니아 문제 도박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유료 공인 도박 상담자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LA 인근에서 한인 도박회복모임을 인도하는 후원자들에게 함께 교육을 받자고 하였지만 백 신부님과 그 모임의 후원자 2 사람과 나 그리고 미국인 여성과 남성 등 6 명이 지금 한인 중독증회복 선교센터의 회복모임 장소에서 함께 매주 1 회 교육을 받았다. 


1999년 3 월에 교육이 끝나고, 바로 시험, 소정의 인턴쉽, 대학에서 심리학 교육이수 서류 등을 제출하여 1999년 6 월에 공인 도박상담자로 그 기관에 등록 되었으나, 돈을 받고 상담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도박으로 돈이 다 없어질 때에 가서야 회복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6. 한인 중독증회복 선교센터 설립과 개원예배 (1999년 10월 16일)  


주위 친구 분들이 도박회복모임을 실시하려고 하자 극구 만류하며, 정부에 확실한 체제를 갖추고 나서 중독자 사역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가 있은 후부터는, 가능한 보완책을 찾기 위해서, 도박가족교실 프로그램 차트를 들고 LA 인근에 잘 알려진 한인 가정상담소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하자는 제의를 했고, 한 기관에서는 좋은 회복프로그램이라며 협력할 뜻을 보여서 2 차례나 현지 회복모임 장소까지 와 보았지만, 회복참석자들로부터 들어오는 헌금 모두는 그 기관으로 입금을 시켜야 한다고 하면서도, 회복모임 운영에 필요한 음료수 비용 등으로 월 $100 지원은 어렵다고 하여, 협상이 결렬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였었다. 


고민과 기도 끝에 1999년 9월 30일 비영리 선교단체 수속을 도와주시는 암창호 목사님을 찾아가서, 소정의 수수료와 절차 비용을 사비로 내면서 선교센터 설립신청을 정부에 하였고, 정부 관련부서에서는 정부가 할일을 대신 해 주어서 고맙다는 서한과 함께 바로 세금면세 비영리 종교법인으로 승인을 해 주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무 사전준비 없이 가서, 임 목사님과 선교회 명칭을 놓고 영문과 한글을 이리 저리 맞추어 보았다. 당시는 도박만 관여해서 주로 도박회복에 관한 명칭으로 정하려다가, 앞으로 모든 중독증 회복을 돕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한인 중독증회복 선교센터(Korean American Mission Center for Addiction Recovery)”로 신청서에 기재하였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 후에 도박, 알코올, 사이버 섹스, 마약, 인터넷, 니코틴, 우울증, 음식 중독 등 무려 8 가지 중독문제에 회복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센터를 설립한 후, 10 여명이 앉기가 어려운 작은 기도실에 집에서 사용하던 식탁이며 의자들을 갖다 놓고, 옆집의 차고를 개조하여 창문과 현광등을 달고, 아무리 신문과 라디오에 홍보를 해도 회복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위에서 질서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마땅히 개원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여서, 10월 16일 박인순 목사님과 친구 분들 10 여명이 함께 기도실에 모여서 단출한 개원예배를 드렸다. 정말 예배를 드리고 나니, 한 젊은 가족이 11월 19일에 수치심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다행이 이들은 원로 목회자 분의 자녀들이었고, 신학까지 공부한 가족이서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모른다.


개원예배에서 부른 찬송은 바로 “부름받아 나선 이 몸(355장)” 이었다.  


지금도 사역으로 힘들고 지칠 때는 입버릇처럼 부르곤 한다! 


“......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 

"...... 종의 몸에 지니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  

“......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 


이 찬송만 부르면 ..... 왜, 이리도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지난 5 년간 실제 회복모임에 참여했던 총 연인원수가 2,500명이 넘는다. 이들을 위한 전화세, 물세, 전기세 등을 모두 개인적으로 부담을 해 와서, 아직 선교센터 명의로 된 전화도 없다.  


그러나 늘 하나님께서는 회복선교센터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여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도 가족 전체의 생사에 걸린 중독문제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전화상담으로, 

인터넷 상담으로, 

실제 회복모임으로, 

온라인 회복모임광장으로 보내주시고 계시다.  


"주님께 이 모든 영광 드립니다!" 

 

-이해왕 선교사-


ARTICLE

한국사회도 거의 같겠지만, 미국 근로자들 중에 80%가 사업체나 직장에서 일을 하며, 15%는 정부 일을, 그리고 5%가 교회나 비영리단체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오늘도 생업은 식품점 종업원 겸 주인인 금년 62세의 한 늙은이가 손님을 받으면서 바삐 컴퓨터 키보드를 치면서 손님이 와도 좀처럼 스크린에서 눈을 띨 줄 몰라서, 어떤 손님은 “너는 왜 손님을 웃으며 반갑게 맞지 않느냐”는 말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장님, 선교사님, 목사님, 전도사님 ...등등 여러 가지 호칭을 듣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자영비지니스를 하니 그냥 사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고, 선교업무를 하니 선교사요, 회복과정에서 정말 감동받은 사람들은 천명이상 교인이 있는 교회 담임목사님보다 더 힘들고 귀한 일을 한다며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왠지 교회목사님들은 전도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1-2 번 상담 전화를 받으면, 못처럼 수치심을 무릅쓰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화를 걸어온 내담자에게 중독회복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것처럼 신뢰심을 주기 위해서 가게손님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까지 30-40분간 하소연을 들어주며 열심히 중독증 회복에 대한 설명에 열을 올린다. 


때로는 전화번호부에 나오는 주소만 보고 아주 번듯한 건물에서 회복선교를 하는 줄 알고, 어떤 곳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가는 실망부터 하는 바람에, 정작 회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도 못한 체 돌아가는 사례가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1. 자비량 선교사의 길 (Tentmaking Missionary) 


대개 교인 60 명 당 1 명 꼴로 선교사를 파송해 왔고, 선교사를 순회선교(Itinerary), 이주선교(Diaspora), 자비량선교(Tentmaking)로 구분한다. 


요즘은 선교사 파송 후원경비가 과거보다 많이 들고, 자녀들의 교육 등도 문제가 되면서 자비량선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들도 점차 단기선교에 비중을 두고, 선교지에서는 오히려  생업을 가진 자비량 선교사의 역할이 증가되고 있다.  


자비량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근대선교의 아버지인 William Carey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793년에 인도에 도착해서... 

"내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고, 나는 구두를 만들어 팔아서 선교경비를 조달한다! 

(My business is to witness for Christ. I make shoes to pay my expenses)”고 했다. 


자비량 선교의 성경적 문구는 바울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했던 사도행전 20장 33-3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래서 생업으로 생활을 하고, 회복선교를 지원하며, 회복참여자들에게 회복과 함께 예수님 사랑을 전하는 일도 바울사도의 자비량선교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회복선교를 하게 만든 아내의 병고 


1995년 5월 9일 아내가 골프를 치고 와서 학질과 같은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종업원 2명을 두고 작은 식품점 마켓을 쾌 오랫동안 운영을 해 와서 부자는 아니지만 살기에는 별로 지장이 없을 정도로 안정되었다. 


처음에는 감기 몸살 정도로만 알았던 열병은 의사들을 잘못만나서, 또는 약을 잘못 써서인지 문제는 점점 더 커져만 가서, 의사와 주위 사람들은 병원입원 2 주 만에 죽을 것 같다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부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서, 그곳에 2 달 반을 입원해 있으면서 여러 검사에도 불구하고 병명은 알 길이 없었다.  


우환에 효자나 장사  없다는 말처럼, 아내 병 수발 3 개월을 하고 나니, 그만 심신이 다 지쳐 있었고, 병원비는 매일 5 천불이 넘어서 그간 병원비만도 무려 36 만 불 정도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이 몇 달 동안 엉망이 되다보니 자식까지 속을 썩여서, 하던 사업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여, 이때 처음으로 50 평생 동안 일해서 모은 재산이 다 없어지는 상황에 처해서, 억지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고, 처절히 낮아져서 세상적인 꿈이 깨어져버린 기분이었다. 


병원에 입원하지 3 개월이 되던 95년 8월 20일 일요일 오전에 정말 괴이한 일이 생겼다. 당시 하도 한인 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이런 원인 모를 병에 걸렸다고 악담을 하듯이 겁을 주며 전도하는 분들 때문에, 교회도 다니지 않으면서, 모 교회에 출석한다는 메모를 아예 아내의 병상에 붙여 놓곤 하였다. 


그런데 그날 병원 복도에서 미국인 남녀가 부르는 찬송소리를 병실에서 듣고 복도에 나가고 싶다고 하여, 서울서 병간호차 온 여동생이 아내를 안아서 복도의자에 앉혀놓았더니 눈물콧물을 흘리며 그분들의 기도를 받고, 그날 이후부터 열병이 가라앉아서, 2 주일동안 일어나서 걷는 연습을 하다가 9월 6일에 퇴원했다. 


그후 아내는 바로 교회에 나갔고, 나는 혼자서 가게를 하면서 95년 8월 31일부터 매일 성경 3-4 페이지를 탐독하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신약을, 그 다음은 구약을 읽었는데, 또다시 신약이 가물가물하여 다시 신약을 읽어서 성경 2,177 페이지를 읽는데 무려 2 년이나 걸렸다. 97년 1월부터는 선한청지기 교회에 출석을 하였고, 그해 6월 29일에는 박상목 목사님 간증초청 예배시간에 흰 불빛 체험을 했고, 98년 4월 5일에 세례를 받았다. 


3. 통신신학 공부와의 인연 


성경을 다 읽어갈 무렵에, 미주복음방송에서 비디오 성서통신강좌 안내 방송이 정말 갑자기 확성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처럼 귀에 크게 들려서 그날 바로 박인순 목사님에게 연락을 드려 등록을 하고, 1997년 7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2 달 만에 연구과 100 개 테이프와 본과 100개, 도합 200개 테이프를 열심히 보며 얼마나 뜨겁게 감명을 받았던지, 바로 나성비디오 성서통신대학 분교사역을 시작해서, 30 여분에게 당시 $700 이나 되는 유료 통신신학과정으로 입학을 안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도는 무엇인가 생활과 연관된 분야를 도우면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어, 98년 1월부터 도박가족회복모임에 매주 참여하면서, 그때부터 책을 통해서 도박중독 회복이론들을 접하면서 더러 도움이 될 자료들은 복사해서, 모임진행 책임자의 양해 하에 10 여 분간 발표를 하곤 했다. 


98년 5월 2일에 성서통신과정 졸업식에서 수료증과 함께 이제부터 당신은 선교사라는 작은 쪽지 한 장을 받았지만,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5월 말경에 1 년 이상 참여해온 도박자 가족모임에서, 후원자로 계셨던 배 장로님의 배려로 15 분간 회복자료를 도박가족들에게 설명했다가, 한 도박자의 아내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게 되었다.  


“당신이 갑자기 어떻게 선교사가 되었으며, 도박중독증에 대해서 무얼 안다고 이따위 자료를 갖고 아는 척 하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렵게 생업에 종사하며 신학통신강좌를 공부하고 이제 막 졸업을 했는데, 당신이 무슨 선교사냐고 따지는 데는 할말을 잃었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배 장로님께서는 거듭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시며 위로를 해 주셨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임에 그만 나오고, 다른 곳에 가서 더 뜻있는 일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 모임 참석을 그만두고 나서, 도박 회복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미국인 단도박 회복모임에 참석하며, 98년 6월 12일에는 CNS 한인 기독교 방송에서 간증을 하기도 했다. 10월 13일부터 3 개월간 백 신부님이 성당에서 운영하는 다른 한인 도박자 회복모임에 도박자로 가장해서 참여할 수 있어서, 한인 도박가족 모임, 미국인 도박회복모임, 미국인 알코올 회복모임, 한인 도박자 회복모임 등에 두루 참석하면서 중독의 이해와 견문을 넓혀갔다. 98년 11월에 우연히 미국기관에서 실시하는 도박 상담자 교육을 알게 되어서, 교수들을 기도실로 초청하여 매주 주말마다 교육을 받았다. 

 

4. 신앙적 체험 


성경에도 주님이 이적을 베푸시곤 반듯이 사람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신 말씀들이 있다. 


♡ 흰빛 영상체험 - 1997년 6월 27일 주일날 예배에서....  

 

박상목 목사님의 “삭개오 중심(누가복음 19장 1-10절)” 초청 설교 시에 흰빛 영상체험을 했다. 박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45 분동안 계속 뒷면에 마치 박목사님의 그림자와 같은 흰빛 영상이 보이기 시작 했다.